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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는 우리로부터" - 염명섭 노머씨 페스트 대표 인터뷰
    아티클/인터뷰 2019. 6. 7. 11:55

    기성세대가 되고도 변화를 추구하기란 쉽지 않다. 살아남는 노하우를 몸으로 배웠기에 굳이 위험을 무릎쓰지 않게 된다. 자금과 사람이 유입되지 않는 씬에서도 그렇다. 도전을 해도 웬만해서는 성과가 손에 잡히지 않기에 오히려 더 위축되곤 한다. 염명섭 노머씨 페스트 대표는 달랐다. "하던대로 하면 안 된다"는 그는 몸사리는데 급급해선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메탈씬에 전례 없는 '외인부대' 전문인력을 들이여 퀄리티 높은 공연을 5년 째 수십회 개최하고 있는 그를 하야로비가 만났다.

     

    Q. 먼저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한다.

     

    반갑다. 밴드 해머링의  리더  노머씨 페스트 대표를 맡고 있는 염명섭이라고 한다.

     

    #커리어

     

    Q. 프로필이 굉장히 다양한데 시간순으로 훑어보려고 한다.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커리어 초기부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식상할 수도 있지만 메탈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중학교 1학년  AFKN 방송과 Eagle FM 라디오 등에 빠지며 입문 음악에 입문했다. 주말이면 음악감상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듬해 처음 기타를 잡았다. 팀으로는 고등학교 스쿨밴드로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당시엔 메탈리카(Metalica), 메가데스(Megadeth), 세풀툴라  스래시 메탈 카피를 자주 했던 걸로 기억한다.

     

    공연장에도 금방 나갔다. 지금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프로팀이 공연 오프닝을 스쿨 밴드에게 맡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친구들을 통해 관객을  모아주니까 그랬겠지. 덕분에 나도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인천 공연장에서 터보(Turbo,  나티), L.P.G., 블랙 신드롬(Black Syndrome) 등의 오프닝을 맡으며 프로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3학년 때는 팀이었던 친구  명과 함께 잠실에 있는 기획사에 들어가게 됐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좋았던 건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통해 알게  회사에 자작곡 세네곡 데모를 제출하고 발탁됐다. 처음에는 우리가 아직 역량이 부족하니  개월 실력점검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해서   가까이 연습생처럼 인천과 홍대를 오갔다.

     

    그런데 결국 앨범을 내지는 못했다. 진짜 앨범을 준비할 때가 되니까 회사에서 제작비와 홍보비를 명분으로 돈을 요구했고, 이때 멤버 일부는 부모님의 반발로 팀을 탈퇴했다. 남은 멤버로라도 작업을 계속했지만 결국 앨범 발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엔 고등학생 신분에도   작업실을 만들어 솔로 기타리스트로 데뷔를 준비했다. 음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혀서 부모님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이때  사람이 잘못 꼬였다. 어린애가  크게 벌리니   하겠다는 계산으로 악기사 사장이 매니저를 해주겠다고 끼어들었다. 솔로 아티스트로 키워주겠다면서 강압적으로 하루에 7~8시간 동안 기타 연습만 하게 했다. 록이나 메탈도 아니고 자기 취향에 맞는 올드 블루스 같은 .

     

    굳이 말하자면 그때 얻어간  없지는 않다. 드림 시어터(Dream Theater) 카피하라면 하고, 그밖에도 다양한 장르를 커버하는 숙제를 하면서 기본기가 잡혔다. 그때 스래시 메탈에 이어 익스트림 계열에 눈을 뜨면서 지금의 음악성향이 잡혔다. 하지만 연습만 하다 작업실을 뺐겼으니 결국 손해가 훨씬 컸지.

     

    Q. 디스코그래피상 본격적인 음악활동은 30세가  돼서야 시작했는데,  전까지는 어떻게 지냈나.

     

    계속 팀을 꾸리긴 했다. 20 초반에는 스피드 메탈 밴드 샤우트(Shout) 스래시 메탈 밴드 네크로시스(Necrosis)에서 활동했다. 번번이 앨범 작업 중에 밴드가 엎어졌을 뿐이다. 그때쯤 군문제부터 먼저 해결하고 돌아왔다.

     

    제대하고 나니 스물넷이었는데 음악도 음악이지만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아버지가 인테리어 가게를 30 하셨는데  일을 도왔다. 방수 페인트, 도료칠을 하면서 전국을 돌았다. 그때 많은  배웠다. 험한 세계에서 살다보니 사람 관계라던가 비즈니스에 있어 영악해졌다. 일단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전수전  겪은 5~60대인데 그들과 콘테이너 박스에서 합숙하면서 살았으니까. 더불어 견적을 받고 관공서 같은 기관과 미팅을 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사업하는 법을 익히게 됐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 후반에 학원을 차렸다. 당시엔 실용음악과가 흥하면서 블루스나 재즈를 가르치는 학원이 인기가 많았다.  전공자가 아니라 아무래도 출발선이 뒤쳐져 있었다. 그래서 아예 록만 가르치는 스튜디오  학원으로 방향을 잡았다. 초등학생한테 다운피킹으로 메탈리카 가르치면서(웃음). 그게 지금까지 12년째 자리를 옮겨가며 하고 있는 가람 뮤직이다.

     

     음악도 손을 놓진 않았는데 그때도   됐다. 포크록 앨범을 준비했는데  공중분해됐다. 그래도 음악으로   길을 찾다보니 CCM 3 했는데 끝이 좋지 않았다. 교회에서 가르치던 중고등학생들이 배울수록 눈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밴드를 지향했다. 당연히 위에 계신 분들은 그걸 반대했고.  과정에서 상처 받고 그만두게 됐다. 그래도 집사까지 했는데 말이지(웃음).

     

    Q. 다른 뮤지션에 비해 현실적인 사연이 많은데, 그러면서도 계속 공연을 하고 커리어를 만든  아닌가.

     

    확실히 돈을 버는 기간이 길었고,  음악을 사업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왜냐면 내가 가진 이름값이 없었다. 당시 홍대에서는 족보를 많이 따졌다. 앨범도 없고 유명 밴드를 거치지도 않은  홀대당할 뿐이었다. 더구나 하던 음악이 그때도 비주류였던 머신헤드(Machine Head) 판테라(Pantera) 그루브 메탈이었으니 더욱 외면당했다. 클럽 공연을 하려고 오디션을 보면 족족  떨어졌고, 심할  화장실에 불려가서 훈계까지 들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향이 경기권 클럽을 많이 도는 길이었다. 직장인 밴드, 연합 밴드, 스쿨 밴드들과 함께 무대에 서면서 확실힌 입지를 만들었다. 홍대에 저항하는 세력의 수장 같은? 말하자면 뱀의 대가리가  거지(전원웃음). 그렇게  길을 돌아 레드 클럽, 이현석씨의 스카이하이  신촌을 시작으로 홍대에 입성했다. 그때  나이가 거의 서른이었다.  경기권에서 활동할  함께했던 동료들이  지역 밴드 협회 임원을 맡고 개인 사업을 불리면서 음악 외적으로  도움을 주는 인맥이 됐다.  인맥이 지금 내가 음악만 하지 않고 다른 여러 일을 벌일  있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 해머링 'D.O.A' 라이브 영상

     

    Q. 2007년에는 현재까지 기타를 잡고 있는 밴드 해머링(Hammering) 가입했다. 당시 해머링은 어떤 밴드였나.

     

    해머링은 2005 보컬 김기찬, 드럼 김용훈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당시엔 프로 지향이 아닌 카피 밴드였는데 2006 국카스텐 원년 멤버였던 유진아 형이 가입하고 2007 내가 가입하면서 자작곡을 준비하고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보컬 김기찬 군은 취미로 보컬을 하다 프로까지 하게 됐다. 활동하던 대학 밴드 동아리가 메탈 중심으로 워낙 열심히 해서 프로가 많이 나오는 팀이었다. 김기찬 군도   하나였다. 원래 시작할 때는 일반적인 노래를 먼저 했지만 그로울링을 파다보니 클린 보컬 근육이 약해져서 지금은 익스트림 창법으로만 부르고 있다. 여담으로 같은 동아리 후배인  블러드스톤 드러머도 프로 생각 없이 하다가 점차 공연 횟수가 늘어 결국 데뷔한 케이스다.

     

    드럼 김용훈도 그냥 드럼만 치다가 투베이스 주법을 파면서 뒤늦게 메탈을 시작했다. 그렇게 둘이 힘을 합쳐 해머링이란 이름을 짓고 활동했는데 초기엔 거쳐간 사람만 10명이 넘을 정도로 인원 교체가 잦았다. 그러다 유진아 형과 내가 가입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베이스 치는 유진아 형은  알려진대로 국카스텐 원년 멤버였다. 사람들이 지금은 국카스텐하면 하현우 덕분에  그룹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초기엔 진아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애초에 진아 형이 음악학원을 하면서 만난 수강생들과 함께 만든 그룹이 국카스텐이었으니까. 나이차가  있었지만 진아형이 리더로서  이끌면서 쌈지락 페스티벌에서 우승하는  좋은 성과도 냈다. 그런데 멤버들이 하나하나 군대를 가면서 연결이 끊어지고 초기 활동이 흐지부지 됐다고 한다. 지금은 자주 만나는 선후배로 지내고 있다.

     

     2007년에 가입했는데 이후에도 한동안 스타일을 찾는 시간이 필요했다. 뉴메탈도 건드려보고 하다가 대략 2013 들어서야 해머링 음악을 정립하게 됐다. 원래 5인조 트윈기타에서 지금의 4인조 원기타 체제를 갖추게  때고 그쯤이다. 원래 기타도 잡던 김기찬은 그때부터 보컬에만 집중했다.

     

    Q. 원년멤버가 아님에도 리더로 밴드를 이끌고 있는데  사연이 궁금하다.

     

    원래는 리더가 보컬이었다. 그러다 해머링이 카피 밴드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내가 자연스레 음악적 주도권을 잡게 됐다. 자작곡이 있어야 홍대 클럽에 들어가기 좋다보니 작곡을 계속 해온 내가 곡을 쓰고, 작품 없으면 활동하기 힘들다고 하니 앨범 작업도 내가 맡게 되는 수순이었다. 그러면서 합주도 지휘하게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뒷풀이나 비즈니스 같은 음악 외적인 부분도 내가 도맡아 했다. 일단 앨범은  냈어도 프로 밴드와 함께한 시간이 길고, 사업적인 경험도 많았으니까. 더구나 다른 친구들이 술을  못한다.  집이 인천이다보니 홍대에서 공연하면 멤버들  보내놓고 해머링 대표로 남아서 밤새 마시고 돌아가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컬은 회사도 다니고 결혼까지 하던 차라 자연스레 내가 리더를 맡게 됐다.

     

    Q. 이끌어보겠다는 본인 의지가 강했고, 또한 멤버들이 리더를 전적으로 믿어준  같다.

     

    사실 처음부터 해머링으로 헤비씬을 울려보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나는 수원에 연고지로 여성보컬이 있는 나비란 밴드에서도 오래 했고. 갓스맥(Godsmack) 같은 스타일도 했다. 해머링은 그때 거쳐가던 여러 밴드  하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밴드에서는 내가 평생  바치고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주도로 작업을 밀어붙였다.  욕심이 많아서 사실 문제도 많았다. 멤버들은  무서워했고 밖에서는 원맨밴드 취급하기도 했으니까. 나조차도 ‘이거  밴드야라고 거만하게 말하곤 했다.

     

    그땐 그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같다. 1집만 해도 내가 데모부터 작곡, 작사, 편곡, 레코딩, 믹싱 모든  지휘했으니까.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 같은 독재자였다. 그러다 다른 밴드에서 해머링을 ‘사실상 원맨밴드라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건너건너 들으면서 이대론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처를 입기도 했고,  고집대로만 하니 작업을 계속할수록 노래가 뻔해진다고 느꼈다. 이번 앨범 작업이 길어진 것도 이번엔 뼈대만 내가 만들고 멤버들에게 파트를 나눠줬기 때문이다. 다들 처음 하다보니 적응기간이 필요했지만 예전 모습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멤버들이 나를 정말 많이 믿어줬던  같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함께할  있었겠지. 말한대로 지금은 내가 쥐고 있던 부분을 많이 내려놨다. 내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리더 자리도 언제든 넘길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놨다. 작년에만 해도 부담되는 일이 있어서 베이스에게 리더를 권했었다. 그리고 그때조차 멤버들이 믿어줘서 다시   리더를 맡고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 현재 해머링 스타일을 완성한 1집 수록곡 'No Mercy' 

     

    Q. 자기복제에 대해 경계한다는 말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있나.

     

    해머링은 2013 경부터 그루브 메탈에 코어 성향을 섞었다는 뜻으로 ‘그루브 코어라는 이름으로 밴드 성향을 규정했다. 그런데 작곡하는 기타리스트라면 다들 격는 딜레마겠지만, 하나의 컨셉에 맞춰 작업을 진행하다보니 BPM이나 음악스타일이 너무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2 데모를 만들어놓고 1집이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 싶으면 전부 버렸다. 어차피 늦어진 (웃음) 우리에게 도움이  음악을 하자는  뜻이 모였지. 순수한 창작을 하자면서 평소에 좋아하고 연주하던 장르를  끊었다. 서로  듣던 장르를 파서 새로운 자극을 찾았다.  프로그레시브와 젠트였고 드럼은 심포닉과 멜데스였다. 타악기가 강조되는 그루브메탈이니 내친 김에 국악과 아프리카 타악기 같은 전혀 다른 영역의 리듬도 연구했다. 그러다보니 멤버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몸이 익숙한 패턴을  버려야 했으니까. 지금 데모는  완성이 됐는데 녹음이 늦어지는 이유도 아직 연주가 손에 익지 않아서 그렇다.

     

    Q. 말한대로 해머링은 앨범 단위로 작품을 준비하고 스타일을 만들며 오랜 시간 활동하고 있다. 이전에  담았던 밴드들과 달리 해머링이 꾸준히 유지될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멤버 전원이 사회생활을 일찌감치 시작해 이미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들 결혼도 일찍 하고 사회인이자 뮤지션으로  번은 거쳐야  시행착오를 빨리 겪었다. EP 내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부딪힐  부딪혀보면서 삶에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래서 2013년도 뒤늦게 프로에 데뷔할 쯤엔 가족이든 친구든  밀어주고 응원해주는 분위기였다. 많은 뮤지션들이 음악을 하다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가로막히고 주변사람과 다투게 되는데 우리는 순서가  반대였다. 프로생활이 늦어져서 오히려 음악 활동이 평탄해진 셈이다.

     

    환경도 환경이지만 자금 문제도 빼놓을 수가 없다. 헤비 씬에서는 장비 업그레이드가 사운드의 질로 직결된다. 그런데 첫째로 구입 비용이 엄청나게 깨지고, 어떻게 산다고 해도 그걸 가지고 다닌다는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필요한 헤드가 20~30kg 하는데 그걸 어떻게 들고 다니나. 결국 차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어렸을 때야 사운드를 포기하면서 공연을 다녔지만 수입이 안정되고 좋은 소리에 대한 욕심이 커지면서 생각을 바꿨다. 좋은 장비를  구해서 공연 때는  차량에 싣고 다닌다. 같이 공연하는 팀이 우리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잡화상 같다고  정도로(웃음).  보면 다른 팀보다 짐이 2 이상 많다. 물론 우리도 무작정 돈만 쓰는  아니라 고민과 연구해서 장비를 고르다보니 4인조임에도 인원이 많은 다른 밴드에 비해 깔끔하면서도 풍성한 사운드를 내게 됐다.

     

    Q. 활동 사항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인천 거점 밴드라는 점이 눈에 띈다. 번외적인 얘기지만 굳이 활동 장소를 서울로 옮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컬씬에 대한 욕심인가.

     

    1990년대 인천은 메탈의 성지였다고 생각한다. 동네마다 비주기적으로라도 연주할  있는 클럽이 있었고 밴드 협회가 너무 많아서 서로 대립할 정도였으니까. 서울의 유명 밴드들도 서울보다 부동산 가격이 저렴한 인천 구월동,관교동에서 합주실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니 인천에서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1시간 이상 이동하면서까지 복잡한 서울로  필요를  느꼈다. 오히려 홍대에서 펑크나 얼터너티브가 유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홍대는 갔다. 인천이 진짜 메탈시티다하는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잔재가 남아있어서 밴드씬에서 인천 출신이라고 하면 거칠게 자랐지만  장르에서 실력을 확실히 키우고 선후배가 확실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로컬씬에 대한 욕심은 메탈을 연주할 공연장, 문화기반시설들이 대다수 사라지면서 내려놨다. 우리도 요즘엔 공연의 90% 서울에서 하고 있다.

     

    Q. 오랜 기간 활동했지만  정규작을 내놓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같은데.

     

    언급한대로 결성 초기에는 커버곡 위주로 공연했고 2007년부터  작업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멤버별로 성향도 너무 달랐고  안에서 해머링의 색을 찾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걸 감안해도 활동 기간에 비해 앨범 발매가 늦어진 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래도 우리가 지나  길을 돌이켜 보면    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빨리 만들어내고 소모되는 음악에 지쳐있기에 멤버 모두가 만족  때까지 공들인 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염명섭 ‘대표

     

    Q. 비교적 최근에 밴드에서 리더 자리를 내려놨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이야기한  있지만  이유에 대해 다시   설명해줄  있나.

     

    아까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작년(2018) 리더 자리를 잠시 내려놨다가 멤버들의 만류로 복귀했다. 이유를 설명하려면 재작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7년부터 2018 사이 나는 밴드와  노머시 페스트로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이 과했고, 결국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 인지도 높은 해외 밴드와 접촉하고 노머씨 페스트에 불러오기 위해 많이 무리하면서 스탭들을 너무 고생시켰다. 여기서 어떻게 성사 직전까지 만들었던 공연이 무산되고 모셔오려 했던 북유럽 밴드는 멤버  분이 뇌질환으로 쓰러져 활동을 중단하는  악재가 겹쳤다. 내가 책임 지고 물러나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머시 페스트 재팬을 열면서 현지에서 취재가 들어오고 하니 욕심이 커졌다. 처음에는 소위 가성비 좋은, 실력은 있고 개런티는 저렴한 로컬 밴드를 주로 섭외해서 동등한 위치에서 상부상조했다. 그런데 공연이  되고 함께하자는 제안이 많아지면서 눈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연배 있는 베테랑 밴드를 섭외했고  다음은 북유럽 팀까지 눈독들였다. 당시 접선했던 밴드들이 한국에서 수요가 거의 없는 블랙 계열이 많아서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러다가 결국 좋은 기회를 잡았다. 철권7 OST에도 참여한 바타르라는 스웨덴 밴드와 얘기가  됐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멤버가 쓰러지면서 무산됐다.

     

    사태가 마무리되고 나서 돌아보니  때문에 해머링이 성공에만 미친 밴드라는 이미지가 생기는  같았다. 그래서 리더 자리를 내려놓고 자숙하면서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했다.  그때  잡아준  멤버들이었다. 내가 실수한 것도 있지만 분명 좋은 결과로 이끌어  일이  많다면서 다시 시작해보자고 용기를 복돋아줬다.

     

    그때 심기일전해서 씬에서 인정 받겠다는 의지로 진행했던 이벤트가 마지막 노머씨 페스트 시리즈였던 헤비게더링이었다. 해외밴드로 라인업에 참여한 언베일 레이즈(Unveil Raze) 영입만 하더라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언베일 레이즈는 12월에 멤버  명이 탈퇴할 계획이었고, 다른  멤버는노머씨 페스트 다음 날에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한국에서 공연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리해서 좋은 조건을 제시해 겨우 함께할  있었다. 여기에 영상 제대로 찍어보겠다고 공연장에 없는 조명도 따로 렌탈하는 데도 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갔다. 적자를 메꾸기 위해 아끼는 기타  개를 팔았을 정도였다.

     

    결과는 그래도 좋았다. 특히 언베일 레이즈 영입이 좋은 수가 됐다. 서로 유대감도 쌓았고, 밴드가 활동을 정비하면 올해 가을 정도에 나고야에서 공연을 같이 해보자고 얘기가 됐다. 헤비게더링에 함께했던 디아블로(Diablo) 잭스에게도 기회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여러 모로 다행이었다.

     

    - 언베일 레이즈 노머씨 페스트 라이브 하이라이트

     

    Q. 말했듯 음악 외적인 사업에 힘을 많이 쏟았는데, 레이블에 대한 욕심은 없나.

     

    레이블과 프로모터에 관한 권유는 많이 있었다. 경험 많으니 해보면 어떻겠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은 없다. 기획만 하는 입장인데도 파리떼가 잔뜩 꼬인다. 지방 페스티벌 기획자들이 같이 해보자면서 너가 투자를 해서 불러보라는 식의 요구가 너무 많았다. 공연   실패하면 돌려막기 급급한 현실이고 나도  예외는 아닌데 말이지. 그런데 여기서    나아가 내가 공연은 물론 아티스트까지 책임져야하는 레이블을 만든다? 그게 과연 오래   있을지 의문이다.

     

    서로에 대한 기대와 이상이 높기 때문에 틀어지는 일을 수없이 봐왔다. 그래서  레이블이나 크루 개념보다 뭉칠  뭉치는 프로젝트 형태를 유지하고 싶다. 노머씨 페스트에 스탭으로 여러 밴드가 참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식 고용되지 않고 우리에게 그때그때 임금을 받고 노하우를 배워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써먹는 형태다.

     

    개인적으로는 레이블보다 인천에 공연장을 세우고 싶다. 인천이 인구 300만명이 되는 5 광역신데 공연장 하나 없다는  말이 되나. 다른 지방 자치구도 보면 시민회관이나 공연홀 등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나마 송도에 공연장이 생겼는데 그쪽은  클래식이나 3세계 음악 중심이고. 록메탈 아티스트가 정기적으로  무대는 거의 없다. 안타깝지 않나. 인천에 공연장이 생긴다고 하면 라이브할 밴드는 많다. 인천 밴드도 아직 많이 있고 서울에서도 오기  거리는 아니니까.

     

    Q.  번외적인 이야기지만 노머씨 페스트가 이제는 수익 안정화가 됐는가.

     

    글쎄. 정확히는 아니다. 아무리 작은 공연을 주최하는 사람끼리 비용부담을 N분의 1 해도 수백만원이 깨진다. 특히 해외 밴드 데려오려면 식사, 통역, 스탭, 픽업비용  포함해 3~400, 많을  7~800까지도  번에 날아간다. 스탭 식사비나 건지는 수준인데 그나마도 각자 몇달씩 준비하고 투자한  생각하면 마이너스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거나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같은 말은 아니다. 노머씨 페스트 스탭들은 이제  공연이 우리만의 공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비씬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꾸준한 무대다. 공연이 열리는 클럽이 있어야 장르문화가 발전하는데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스탭들은  현실을 바꿔보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똘똘 뭉쳐있다. 그러다보니 신진 밴드들이 ‘노머씨 페스트 진출이 목표다라고 말하는 날이 오게 됐다.

     

    끈끈한 결속을 자랑하는 노머씨 페스트 스텝과 출연진, 관객들 © 노머씨 페스트 페이스북

     

    Q. 스탭들의 단결력이 대단한  같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견디게 되는 원동력이다. 특히 이번엔 콘민 뮤직비디오 페스트와 노머씨 페스트가 2 간격으로 열려 정신이 없었는데, 스탭들이 오히려 나를 격려해주더라. 고정으로 함께하는 인원이   정도 되는데 시너지가 대단하다. 서울부터 부천, 인천 해서 다들 멀리 사는데도 열흘에  번은 모이곤 한다.

     

    Q.    간은 노머씨 페스트를 비롯해 카파렐리 기타(Carparelli Guitars), 벨캣(Belcat)와의 협업  밴드 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밴드시장에 이런  필요하다 생각이 있었나.

     

     질문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다. 흔히 국내 메탈시장을 ‘그들만의 리그라고 한다.  척박하고 매니악한 성격은 어쩔  없더라도 대중에게 노출조차 되지 않는 환경이 답답했다.  노출을 어떻게 하느냐를  기업체와의 비지니스로 가닥을 잡았다.

     

    해머링 프로필과 노머시 페스트 기획안을 들고 각종 사업체와 접선하며 메탈공연이 어떤 매력이 있는지 어필했다. 발로  만큼 성과과 따랐다. 맥주, 의류, 화장품, 악기, 헤어  프랜차이즈까지 하나하나 우리 편을 만들어갔다. 기업체가 메탈공연을 후원하고 홍보한다면 잠재적 관객인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있으리라 판단했다.

     

    성공사례  하나가 2015 국내 런칭을 시작한 호주 맥주 브랜드 부다(Buddha)와의 파트너십이다. 계약 체결  부다는 노머씨 페스트를 찾은 모든 관객에게 맥주 무료 제공하고 공연장  시음 부스를 설치했다. 이에 다른 기획자나 매니저들에게  저와 부다 맥주와 연결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고, 우리는 철밥통 지킬 생각 없이 여러  페스티벌과 라이브 클럽에 연결해줬다. 우리가  조금  벌어보자고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한류 아이돌, 연예인들에게 의상을 협찬하는 브랜드 ‘바이더알 그렇다. 바이더알은 원래 /메탈에 관심도 없었다고 우리에게 직접 말했다. 그러나  달에 걸쳐 해머링이 제작한 수많은 머천다이즈 상품과 활동 자료를 보내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대면 회의를  거쳐 파티너십을 맺고 2018 펜타포트  페스티발부터 함께하고 있다. 해머링 정규 2집부터는 바이더알과 콜라보 티셔츠  굿즈를 제작하기로 했다. 앞으로  기대해볼만 하다.

     

     밖에도 헤어 프랜차이즈 브랜드, 헤어왁스 업체와는 나와 해머링이 직접 모델로 참여해 지면과 SNS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광고비는 고스란히 노머씨 페스트와 해외 공연 자금으로 이어졌다.

     

    현재는 악기 브랜드와 협력하는  힘을 쏟고 있다. 내가 엔도서로 활동하는 카파렐리 기타와는 노머시 페스트의 악기협찬을 통해 기부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동물보호단체나 소아암어린이 돕기에 수익금을 기부하고  증서를 항상 만들어 공개하는 중이다. 벨켓은 공연장을 찾아온 관객들에게 추첨을 통해 사은품을 제공하고 있다. 덕분에 관객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게 됐다. 뭐라도 들고 가면 기분 좋게 다음 공연이 보고 싶어지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냉정히 말하자면 기업체 입장에서는 헤비메탈에 관심 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 메탈이 대중에게 어떤 이미지인지 생각하면 오히려 피하면 피했지. 더구나 수익성이 안전하지도 않다. 일반  밴드들도 구설수가 많고 소속된 인디 레이블이 작은 공격에도 픽픽 무너지는데 메탈은  어떻겠나. 메탈에서 지금까지 기업체 지원을 받지 못한 가장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팅을  때면 항상 사람을 강조한다. 과격한 음악성에 가려진 순수한 열정, 젊음, 분명한 자기철학을 보여준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리지만 대중은 메탈이 여전히 젊은 문화라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 대충 나이 많고 정신 이상한 인간이 하는 음악처럼 생각하는데, 보면 알겠지만 뜻을 같이하기로  친구들을 보면 착실하게 직장생활 하면서 음악도 열심히하는 어린 사람이 많다.  부분을 우린 적극적으로 들이민다. 젊은 밴드 라이브를 보여준다던가, 쾌적하게 정리한 작업실에 초대한다거나, 20종이 넘는 머천다이즈를 보낸다던가…. 해머링으로는 1  해외 레이블과 계약하고 외신에 실린 자료를 보여줬다. 해외에서 받은 인정을 국내 업체에 어필하는 아이러니지. 역수입으로 발굴된다는 느낌도 있다.

     

    Q. 뮤지션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오래 활동한 밴드들이 앨범 발매가 늦어지는 이유는 다들 비슷하다. 기대치가 높다보니 퀄리티가 만족이  되면 갈아엎어서다. 우리도 레코딩을 2  하고 있는데 밖에서는 장난으로 블록버스터라도 만드냐한다. 그런데 아마 3년차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웃음).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1 이후 콘솔을  교체하면서 딜레이가 생겼다. 앞서 말한대로 다른 스타일에 적응하는 문제도 있었고. 소속사에서도 해외 라인을 많이 잡기 위해 요구하는  많았다. 싱글을  거면 뮤직비디오도 찍어야 하고, 마스터링은   해야하고 그런 거지. 그래도 베이스, 드럼까지는  땄고 기타도 녹음이 끝나간다. 보컬만 아직 적응이  필요해서 녹음을 못하고 있다.

     

    앨범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1집에서 밀던 ‘그루브코어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그루브에 중점을 두고 미디엄 템포로 진행된다는  틀만 유지한다. 그밖에는 뉴메탈에 가까운 슬램을 유도하는 음악이다. 사운드에 있어서는 그루브 메탈이 아닌 음악에서 그루브를 유도하는 실험을 했다. 네오클래식에 그루브를 넣으면? 젠트나 프로그레시브처럼 변칙적으로 쪼개지는 박자에서 그루브를 만들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앨범에서 보여주려고 한다. 들어보면 곡마다 다른 장르를 즐길  있을 거다.

     

    그중  곡은 7월쯤 싱글로 발매한다. 샤이닝을 테마로 공포영화에서 사용하는 효과음을 차용해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로 만들고 있다. 공포전문 웹툰작가  뮤직비디오 감독  명과 코드가 맞아 뮤비 스케치 작업에 들어갔다.

     

    정규는 글쎄. 회사에서는 올해 말까지는 내길 바라는데 솔직히 데드라인을 잡지는 못하겠다. 1집에서 워낙 기한을  맞췄기 때문에(웃음).   세밀하게 다듬어 내고 싶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지는 않다.  빼기 싫어서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들어와도 해외 투어까지  거절하고 있다. 우리가 준비가 됐을  다시 제안이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2집을 들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크다.

     

    그밖에는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한다. 지나친 욕심과 계획으로 사람도 많이 잃었고 나도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는 당장 앞에 놓여진 일에 최선을 다해 나중에 돌아볼  후회가 없도록 하고 싶다.

     

    #노머씨 페스트

     

    Q. 노머씨 페스트를 기획하게  이유와 계기에 대해 다시   설명을 듣고 싶다.

     

    밴드들과 단발성 교류 공연들을 해보니 아쉬움이 많았다. 공연을 마치고 나면 인연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소속감도 없기에 다음을 기약하기도 어려웠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유대감과 소속감을 가질  있는 기획을 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노머시 페스트 이전에 2 정도 작은 크고 작은 기획을 벌였다. 시행착오도 미리 겪고 함께할 인재를 찾는 과정이었다. 사진촬영팀, 영상찰영팀, 무대 스탭, 홍보, 머천팀 등등. 멤버를 추린 후엔 2015 인천의 블랙버드라는 공연장에서 부산, 서울,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2팀을 선정해 연합공연을 시작했다. 부산에서는 과매기와 매닉시브(Manixive), 서울엔 미디안(Midian) 메스그램(Messgram), 인천에서는 알포나인틴(R4-19) 해머링이 선발됐고,  모임이 노머씨 페스트의 전신이 됐다. 이후 인천을 벗어나 서울로 거점을 옮겨 일본 밴드들과 교류를 시작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Q. 그때부터 함께하게  인연들에 대해 소개해줄  있나.

     

    우리 스탭들 이야기를    없다. 언젠가 따로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는데 5년째 실행으로 옮기진 않고 있다(웃음). 우린 처음부터 거의 외부인사만 영입했다. 누가 봐도 좋은 공연을 만들려면 하던대로 하면  된다. 그래서 새로 시작하는 입장인 우리에게 자기만의 노하우를 고집하는 기성작가는 맞지 않았다.

     

    처음 팀을 꾸렸을  노머씨 페스트 스탭들은 외인부대 같았다. 메탈에 관심도 없던 완전 3자가 전문기술을 들고 와서 일하는 형태였다. 편견이 없고 고인물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오니 공연의 문제점이  보였고, 그렇게 5년이 지나니 원하던 그림을 만들  있었다.

     

    대표사례가 콘텐츠민주주의다. 콘민은 원래 메탈과는 전혀 관계 없는 미디어 회사였다. 원래 밴드 음악을 좋아하던 김도연 대표가 관심을 보이면서 협업하게  케이스다. 메탈의 자격이라는 30 조명 콘텐츠를 시작으로 문화의 흐름을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는지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는 중이다. 이제는 콘민 자체도 규모가 많이 커졌고 노머씨 페스트와도 3회때부터 계속 함께하며 파트너십을 굳히고 있다.

     

    새로 알게  인연은 아니지만  시기에 빼놓을  없는 사람들도 있다. 멤버들의 아내다. 우리가 머천다이즈 사업을 오버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벌일  있는 배경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업체가 정해지지 않다보니 디자인, 제작, 판매까지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야했는데 소위 말하는 ‘여성의 섬세함 없었으면 이렇게 탄탄하게 갖추지 못했을 거다.

     

     

    Q. 사실 먼저 했어야 하는 질문인  같다.  ‘노머씨 페스트인가?

     

    해머링 앨범 수록중에 ‘No Mercy’ 곡이 있다. 어감이 좋고 무바지한 메탈 공연 이미지를 주기 좋아 선택했다. 그런데 워낙 사은품 제공이나 기부 이벤트 등을 적극적으로 펼치다보니 우스개소리로 ‘Mercy Fest’라는 별칭도 얻었다(웃음).

     

    Q. 노머씨 페스트는 퀄리티와 더불어 ‘지속 가능한 공연 굉장히 의식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미국의 오즈페스트처럼 ‘한국 메탈하면 떠올릴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것인가.

     

    노머씨 페스트는 국내 뮤지션이 꾸준히   있는 무대를 제공함과 더불어 한국과 해외 메탈씬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하는데 의의를 둔다. 매년 메인 공연 2회에 메탈 업라이징, 헤비게더링, 콜라보 기획  서브 브랜드로 공백을 채우고 있다. 작년에는 노머씨 페스트 이름으로만 공연 8번을 열었다. 부지런히 무대를 만들면서도 공연이 식상해지지 않도록 라인업에 변화를 주고 있다.

     

     변화가 일회성을 말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함께한 팀은 앞으로도 계속하자고 제안한다. 다만  팀이 연달아 같은 무대에 오르지만 않게 한다. 특히 해외 밴드는 노머씨 페스트로  부르기보다 국내 다른 공연으로 연결해준다. 밴드 내한 기획안 자체를 우리가 제출하는 식이다.

     

    더불어 매년 노머시 페스트 재팬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시장도 노크하고 있다. 오는 8 9~10 뉴클리어 이디엇츠(Nuclear Idiots) 국내헤비메탈역사에서 빼놓을  없는 제로지(Zero-G) 참가한다. 다리 역할이란 이런 뜻이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과거 국내 메탈 기획 공연  헬라이드를 동경했다. 해머링이 2015 헬라이드 페스트에 참가했을  느꼈던 뜨거운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노머씨 페스트에 참여하는 밴드에게도 그런 에너지를 주고 싶다. 지속적인 공연개최가 얼마나 힘든지 요즘 실감하고 있지만, 헬라이드 같은 모범사례를 참조하며 계속 노력하고 있다.

     

    Q. 노머씨 페스트 재팬을 소개할 에피소드가 있다면.

     

    노머씨 페스트 재팬은 2017년도에 출범했다.  전엔 단발성으로 클럽을 돌았는데, 매번 공연만 하고 돌아오는 그림이라 아쉬움이 많았다. 일본 밴드들이 자기 일정 바빠서 어울리지도 않고 뒷풀이도  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팀을 꾸려 기획으로 갔는데  번에 한국 밴드를 보는 현지의 시선이 달라지는  느꼈다. 매거진이나 커뮤니티에서 바로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더라. 그라인드하우스, 타워레코드 같은  신주쿠 웹진에서 인터뷰를 따갔다. 로컬 라디오와 전문 유튜버들도 우리를 다뤘다. 혼자갈 때와 뭉쳐갈 , 그리고 타이틀을 가져갈 때가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다.

     

      좋은 반응이 오면서 라인업도  계획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일본 공연에 국내 밴드가 너무 많아도 의미가 없으니 두어팀 정도만 데려가고,  안에서도 되도록 장르가 겹치지 않고 신구를 아우를  있도록 컨택한다. 그렇게 뽑은 밴드들은 2~3 가량 도쿄에서 무대를 가진다. 하루는 수용인원 100여명짜리 라이브하우스에서 노머씨 페스트 이름을 걸고, 다른 날은 현지 기획에 껴서 공연한다. 그러다보니   일본에  팀은 자신감과  소속감이 생겨서 스스로 현지 인맥을 찾고 진출할 발판을 만들더라.

     

    Q. 콘텐츠 민주주의와의 제휴도 인상적이었다. 영상팀을 동원해 공연 실황을 기록하는 장면을 국내 메탈 공연장에서 보게될 줄은 몰랐다.

     

    원래 노머씨 페스트 영상은 지인에게 부탁을  만드는 가내수공업 방식이라 퀄리티를 포기해야 했다. 전문인력인 콘텐츠 민주주의가 들어오면서  아쉬움은  번에 해결됐다. 홍보 영상, 밴드인사 영상, 하이라이트 영상, 밴드별 라이브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해주니 밴드나 우리나 만족도가 아주 높다.

     

    - 콘텐츠 민주주의는 노머씨 페스트 모든 영상을 촬영/편집하고 있다

     

    Q. 앞서도 간략히 이야기했지만 콘민과 연을 맺게  계기를 자세히 설명 듣고 싶다.

     

    콘민 대표 김도연 피디는 /메탈을 사랑하고, 직접 앨범도  정도로 본인도 자질도 있는 사람이다. 콘민이 1 미디어일  본인이 사랑하는 음악을 다루고 싶다고 제작한게  메탈의 자격이었다.  밴드를 2~30 조명하는 다큐를 5회까지 촬영했다.

     

    그렇게 홍대씬에 발을 들이면서 처참한 현실에 이내 화를 냈다. 밴드가 어떻게 개런티 없이 활동하냐고. 무명 밴드는 공짜로 공연하는 일이 부지기수고 유명한 밴드도 턱없이 적은 개런티를 받을 때가 많으니까. 공연장 상태와 밴드들의 프로의식에 대해서도 쓴소리했다. 조명부터 엉망인 공연장에서 큐시트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밴드가 어떻게 좋은 라이브를 남길  있겠냐고 했다.

     

    그래서 진행한 프로젝트가 이번 콘민 뮤직비디오 페스트였다. 신인 밴드에게 훌륭한 영상을 남기자며 웨스트 브릿지라는 무리한 공연장을 대관해서 페스트를 진행했다. 기획사 없이 5 이내로 활동한 밴드  팀을 선정해 무대를 꾸몄다. 아쉽게도 콘민이 쏟은 지원에 비해 성과가 적었지만. 그렇다고 누구를 비난하거나 탓할 수는 없다. 현실이었을 뿐이고,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다시 도전하고 싶다.

     

    Q. ‘어떻게 개런티 없이 활동하냐 말은 홍대씬의 문제점을 관통하는  같다.

     

    냉정하게  홍대뿐만 아니라 공연시장 전체가 성장이 굉장히 미미하다.  년전과 그리 다를  없다. 아직도 1만원대 티켓과  노개런티로  공연을 하는 밴드가  많다. 그러니 앨범은 더욱 내기 힘들어진다.  악순환을 끊으려면 공연장, 밴드, 관객 모두 고민하고 개선 방안을 찾아야한다.

     

    무대에 서고 직접 기획도 하는 입장에서 선택할  있는 길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티켓값을 올릴  있고, 밴드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있는 환경을 만들  있다. 노머씨 페스트가 공연 퀄리티를 높이고 관객 입장에서 공연을 더욱 즐길  있는 여러 이벤트를 제공하는 이유다.

     

    Q. 노머씨 페스트 계열 밴드를 인터뷰할 때마다 메탈이라는 장르가 ‘고인물 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확인하곤 한다. 애초에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기용하는  같은데 사실인가.

     

     여러 직업을 거쳤다. 노동 현장부터 개인사업까지 해보며 수년간 영업과 비지니스를  배웠다. 음악에만 평생  담은 숭고한 아티스트들과는 분명 결이 달랐다. 그렇기에 애초에 노선을 내가 잘할  있는 공연 기획에 무게를 싣는 쪽으로 잡았다. 협력업체와 윈윈 하는 시스템을 선례로 남기기 위해 사업가 마인드로 접근해야 했고, 팀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꾸리게 됐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도전정신이 강해 말한 대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이와 별개로  말이 있다.  인생의 많은  포기하면서 음악을 선택한 모든 아티스트들을 존경하며 지지한다. 하지만 많은 뮤지션이 변화를 거부하며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는  너무 아쉽다.

     

    고인물이라고 했나. 나도 누군가에게는 고인물, 썩은 물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바뀌어야 한다.

     

    Q. 경쟁력 있는 해외 밴드를  팀씩은  라인업에 올리던데, 여러 목적이 있겠지만 ‘그들만의 리그 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해석해도 되는가.

     

    그렇다. 관객은 냉철하다. 지금 노머씨 티켓값이 현매 기준 4만원대다.  가치를 증명하려면 다른  곳에서    없는 무대와 이벤트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해외 라인업에  신경을 쓰고 있다. 자본력이 부족해 메이저 밴드 섭외는 힘들지만, 가능한 최대한 매력적인 밴드를 찾는데 힘쓰고 있다. 지금도 일본뿐 아니라 독일, 스웨덴, 핀란드, 중국  각국 밴드와 접선하고 있다.

     

    - 하야로비의 메탈 업라이징 전체 스케치 

     

    Q. 같은 맥락에서 산하리그(?)처럼 운영되고 있는 메탈 업라이징에 대해서도 빼놓을  없다. 고정적으로 신인을 기용할 무대를 만든 셈인데 수확이 있는가.

     

    신인 밴드의 등장과 그로 인한 순환이 씬이 살아있는지를 판단하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메탈 업라이징이란 서브 기획을 진행하는 이유다. 3 전부터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마다 열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현장 투표 서바이벌 방식을 도입해 긴장감을 줬다. 상위권에 오른 밴드는 노머씨 페스트와 직접 컨택해 함께하고 있다. 수확이라면 그렇게 가려낸 밴드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Q. 여담으로 메탈 업라이징을 통해 등장한 밴드  특히 주목하는 팀이 있다면?

     

    1회때는 멤낙, 깜귀, 진격, 올어게인스트(All Against), 포말 어페시(Formal Apathy) 메탈적인 밴드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2회때는  크랙샷(Crackshot),  잭스, 뉴클리어 이디엇츠, 루디 밴쉬(Loody Bensh)  헤비 락계열의 밴드들이 활약했다. 올해 3회째는 레드 소네트(Red Sonnet), 플라이야(Fly Yahh), 러스트러블(Lustrouble) 등이 활약하고 있다.

     

    사실 좋은 신인이 메탈 업라이징을 통해 등장한다기보다 이미 실력은 검증됐지만 인지도가 부족한 밴드를  섭외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도 많은 신예가 도전했으면 한다.

     

     

    #주변사람들

     

    Q.  대표 주변에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힘내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내 김문영씨는 물론 잭스(The Jaxx), 뉴클리어 이디엇츠(Nuclear Idiots), 김도연 콘텐츠 민주주의 대표 등이 그렇다. 일일이  나열할  없겠지만 적어도 언급된 이들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있나.

     

    위에서 언급한 듯이  변화를  즐기고  도전하는  사람을 찾다보니  하나의 크루처럼 뭉치게 됐다. 하나하나 열거하기엔    분량이 나올테니 생략하고, 그저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좋은 공연을 함께 만들어나가고 싶다.

     

    Q. 그래도 굳이  명을 꼽아 이야기하자면.

     

    아내다. 알겠지만 뮤지션 대부분이 결혼 후에 음악활동을 두고 배우자와 싸운다. 주말은 공연 때문에 반납하기 일쑤고, 그외에도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적으니까.  아내는 가끔씩은 아쉽다고 말하면서도 노머씨 페스트 일원으로서 일할  전혀 그런 티를  낸다. 항상 고맙다. 아까 머천다이즈 사업이   이유로 ‘여성의 섬세함 꼽았는데 그게 사실  아내 이야기기도 하다. 머천다이즈 사업 총괄에다 화장품 업체에 다리를 놔주는  남자가   없는 일을 많이 해준다. 덕분에 우리는 메탈 기획인데도 여성 관객이 좋아할 아기자기한 선물이 많다  혼자였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그리고 한국메탈

     

    Q. 한국 메탈이란 세계에서 20 년을 몸담았다. 지금  차례 돌아볼 ,  대표가 보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최근 밴드들의 자생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과거처럼 레이블이나 기획사, 투자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밴드 하나하나가 작은 기획사를 방불케  정도로 성장하고 있기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적극적인 SNS 유튜브 활용이다. 매니아들도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멋진 밴드를 찾을  있고, 그만큼 씬은 성장할  있을 것이다.

     

    Q. 자생한 세대가 씬의 미래를 짊어질  있으리라 보는가.

     

    그렇게  수밖에 없다. 자생력이란 누가 가르친다고 배울  없다. 젊은 세대가 몸으로 체득했다고 생각한다. 포스터, 홍보, 비즈니스  모든  멤버 개개인이 배우고 써먹는 시대가 됐다. 밴드 모집만 보더라도 이젠 연주 실력은 기본이고 포토샵이든 영상이든 덤으로 하나는   알아야한다. 가내수공업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주변에 부탁해야하고, 그러면 퀄리티와 속도 모두 떨어지니까. 클럽주 입장에서 공간만 대여해주고 기획부터 홍보까지 알아서 해주는 밴드를 선호하지 않겠나. 이미 밴드가 모든 일을 알아서 하는 싸이클이 완성됐다고 본다.

     

    일본은 이런 문화가 진작 잡혀있었다. 밴드가 활동도 자금도 자급자족한다.  일본에 갔을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머천다이즈 같은 세일즈 사업을 시작했다. 덕분에 지금 자생하려는 친구들에게 노하우와 인맥을 알려줄  있었고, 신진 밴드들은 배운대로 바로바로 자기 스타일로 소화하고 있다.

     

    Q. 인터뷰 내내 말해왔지만,  대표는 메탈이 젊고 신선한 문화가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적어도  음악을 듣고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세가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다양한 문화가 발전하려면 위해선 서브컬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없어야 한다. 한국에선 미디어가 다양한 장르의 들을 권리를 박살냈기에 장르가 편향적으로 성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편식하지 말자.

     

    Q.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한국 메탈 팬덤에서는 국내 밴드에 대한 평가나 인심이 많이 박한 편이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커뮤니티에서 내한공연에만 열광하고 지갑을 여는 모습을 보면 아주 안타깝다. 그많은 메탈 매니아들이 국내 공연장에는 오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트렌드와 기술을 바로바로 습득할  있는 시대가 됐고, 덕분에 국내 밴드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선입견과 저평가를 버리고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했으면 좋겠다.

     

    Q. 끝으로 독자와 리스너에게  마디 부탁한다.

     

    이렇게 디테일한 인터뷰는 처음이라 대답 하면서 걸어온 길을 다시금 뒤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메탈 하면 떠올리는 어둡고 부담되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하야로비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노력하고 있다.

     

    계속 지켜봐달라. 관심과 응원이 있다면 한국도 /메탈의 불모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있다. 그리고 우리도 롱런할  있는 밴드 해머링과 노머씨 페스트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인터뷰 : 유하람

    촬영 : SONG FOR HER

    장소제공 : 해머링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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